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튀르키예 관계 (문단 편집) === 근세 === [[파일:suleiman.karl.jpg|width=660]] [[프랑수아 1세]](좌)와 [[쉴레이만 1세]](우) [[152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1519년부터 155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1516년부터 1556년까지 [[스페인]] 왕으로 재위하여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한 인물이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파비아에서 완패하고 국왕마저도 생포된 것. 그리고 설사 패배해도 왕이 포로로 잡히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프랑스 궁정은 [[멘붕]]했고, 자리를 비운 국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모후 [[사부아|사보이아]]의 루이사를 중심으로 대책이 수립된다. 이교도고 뭐고 가릴 계제가 아니니, 당장 강력한 대제국인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한 것. 한편 오스만 제국의 황제 [[쉴레이만 1세]]는 1522년 로도스 정복에 성공한 이후 한동안 원정을 쉬고 있었는데 1525년 12월 프랑스의 사절을 접견한 쉴레이만은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526년 2월에 카를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 왕을 당장 석방하고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지 않는다면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가겠노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대제국을 통치하고 있던 황제 카를은 쉴레이만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는 한달 전인 1월에 프랑스에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고 풀려난 상태였다.].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종교의 차이를 넘는 동맹 관계가 되었고 이를 '''프랑스-오스만 동맹([[프랑스어]] : Alliance franco-ottomane, [[튀르키예어]] : Fransa-Osmanlı ittifakı)'''이라고 한다. 이후 양국은 무역, 문화 등에서 활발하게 교류했다.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의 상업 활동에서 큰 이권을 부여 받았으며 오스만 제국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문화적인 영향으로 오스만 제국의 문화가 프랑스를 통해 유럽에서 유행하는 [[튀르크리]]가 퍼지게 되었고 [[튤립 시대]]의 오스만 제국에서는 프랑스의 문화가 오스만 제국 상류층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라트 4세]]가 흡연을 한 프랑스 대사관 직원들의 귀를 베어버린 사건으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종교적인 것에서도 차이가 커서 갈등이 있었는데 일부 프랑스인들이 [[베네치아 공화국]]등 오스만의 적국과 손을잡고 의용군 형태로 오스만과 싸우는 일도 있었다. 해적질이과 전쟁 등 종교적 출동이 만연하던 시대에 이교도랑 동맹을 맺었으니, 당연히 열받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성 요한 기사단(병원 기사단)만 해도 자원자 1위가 프랑스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